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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휴머니즘 [디지털 시대의 인간회복 선언]

  • 원서명You Are Not a Gadget (ISBN 9780307269645)
  • 지은이재론 레이니어
  • 옮긴이김상현
  • ISBN : 9788960771772
  • 20,000원
  • 2011년 01월 31일 펴냄
  • 페이퍼백 | 304쪽 | 152*224mm
  • 시리즈 : acornLoft

책 소개

● 원서 출간 직후 아마존닷컴 이 달의 베스트셀러(Best of the Month)에 등극한 화제작
● 가상현실의 창시자 재론 레이니어가 지적하는 “참을 수 없는 ‘인터넷 문화’의 가벼움”, “지금 인터넷은 ‘디지털 파시즘’으로 치닫고 있다.”
‘집단 지성’, ‘군중의 지혜’ 외치는 웹 2.0의 허상을 통렬히 고발한 문제작 - 2010년 미국 출판계, 사이버컬처 부문의 베스트셀러.

‘집단 지성’과 ‘군중의 지혜’가 찬미되는 웹 2.0의 세계. 페이스북과 트위터, 위키피디아가 득세하는 신 디지털 세상. 바야흐로 디지털 유토피아가 실현되는 것일까? ‘가상 현실(VR)'의 창시자이자 원조 웹 세대인 재론 레이니어는 그렇지 않다고 급브레이크를 건다. 인간을 벌집 속의 벌처럼 여기는 웹 2.0에서 그는 도리어 ‘디지털 파시즘’의 징후를 읽는다. 열림, 공유, 소통을 깃발처럼 내세웠으나 실상은 그를 억누르는 ‘위배 이데올로기’의 속성을 본다. 우리 안의 맹목성과 야수성을 일깨우는 ‘익명의 온라인 문화’를 끄집어 낸다. 우리를 디지털 기기(‘가젯’)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등 떠미는 신 디지털 세계의 반인간적 흐름에 일대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레이니어의 외침은, 웹의 선도자중 한 사람으로 꼽혀 온 그의 입지 때문에 더욱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와이어드」의 창간 편집장인 케빈 켈리, ‘롱테일 효과’의 크리스 앤더슨, ‘인지 잉여론’의 클레이 셔키 등 전설적 디지털 전도사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흥미로우며, 웹 2.0, 혹은 소셜 웹의 밝은 면만 들어온 이들에게는 충격의 각성제로 작용할 문제작이다.


[ 소개 ]

우리가 기술을 통제하기를 멈추고 기술이 반대로 우리를 통제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980년대 이후 실리콘밸리의 선지자로 자리매김한 재론 레이니어는 월드와이드웹이 상거래와 문화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고 예견한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웹이 등장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 레이니어는 웹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그 방식에 대해 그만의 도발적이면서도 조심스러운 시각을 제시한다.

현재 웹의 디자인과 기능은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서 수십 년 전에 이미 고착된 프로그램적 결정으로부터 나왔다는 기술임을 간과하기 쉽다. 맨 처음 웹을 디자인한 이들은 그 뒤에 막대한 (그리고 종종 의도하지 않은) 영향을 끼친 중대한 선택들을 내렸다. 온라인상의 익명성을 보장하게 한 결정이 그 중 하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같은 디자인이 재빨리 고착되어(locked in), 웹 구조 자체의 영구적인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레이니어는 제대로 고려되지 않은 디지털 디자인이 낳을 수 있는 기술적 문제와 문화적 문제를 짚는 한편, 컴퓨터에 지나치게 의존한 우리의 금융 시장과, 위키피디아,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웹사이트가, 군중과 컴퓨터 알고리즘이 생산하는 소위 ‘집단 지성’을 개별 인간의 지력과 판단력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고 경고한다.

레이니어는 또한 다음과 같은 주제를 짚고 그만의 통찰을 제시한다.

● 1960년대의 반정부적 피해망상증이 어떻게 온라인 세계의 디자인에 영향을 끼쳤으며, 온라인 담론의 악성 댓글과 경박함을 부추겼는가
● 파일 공유가 예술을 추구하는 중산층을 어떻게 궤멸하고 있는가
● 기술을 통한 ‘휴거’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저명한 공학자들을 부추기는가
● 왜 새로운 인간적 기술이 필요한가

『디지털 휴머니즘』은 논쟁적이고 매혹적이다. 그리고 기술이 우리 문화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가를 탐구하면서 개별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곡진하게 변호하는 이 책의 주제에, 레이니어보다 더 열정적이고 적합한 사람도 달리 없어 보인다.


[ 책 속으로 ]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디지털 혁명에 무엇인가 잘못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월드와이드웹은 ‘웹 2.0’이라고 부르는 하찮은 디자인들로 넘쳐났다. 이 이데올로기는 웹상의 급진적 자유를 홍보하지만, 실상 그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사람보다는 기계를 위한 자유다. 그럼에도 웹 2.0은 종종 ‘열린 문화’와 동일시된다.___p.21

익명의 블로그 댓글, 저급한 비디오 장난질, 경박한 매쉬업(Mash-up) 따위는 언뜻 사소하고 무해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처럼 널리 퍼진 단편적이고 비인격적인 커뮤니케이션 관행은 인간적 상호 작용의 품격과 질을 떨어뜨린다.___p.22

소프트웨어의 사정은 철로보다 더 나쁘다.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독단적이며 복잡하게 뒤엉킨 규정을, 항상 절대적 완벽성으로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설계상의 요구가 워낙 엄격하고 완고해서, 이리저리 바뀌는 표준을 맞추는 일은 끝없는 투쟁과 다름 없다. 철로의 세계에서 따라야만 하는 규정의 고착을 한갖 깡패에 비유한다면, 디지털 세계에서는 절대 권력을 쥔 폭군에 견줄 수 있다.___pp.28-29

고착화된 소프트웨어에 언제 철학적 사고가 융합되는지 면밀히 관찰해 볼 만하다. 예컨대 온라인에 만연된 익명성이나 필명성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이는 중요한 질문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의미를 표현하는가에 대한 소통 철학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의 디자인에 너무나 깊이 배어든 나머지, 이제는 그 익명성/필명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거나, 상황이 그와는 다르게 전개됐을지도 모른다는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___p.37

익명성의 유행은 1990년대 ‘모든 이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줄’ 것처럼 보였던 인터넷의 멋진 가능성을 좌절시켜 버렸다. 그 익명성의 유행이 사디스트(가학 성애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힘을 실어줬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일반인의 품격을 격하시킨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___p.39

요즘 디지털 문화의 결정적 실수는 개인의 네트워크를 하도 잘게 썰어놓아 결국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곤죽처럼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별적인 ‘사람’보다, 네트워크라는 추상적 개념 자체에 더 마음을 쓰게 된다. 네트워크 그 자체는 실상 무의미하며, 오직 사람만이 유의미한데도 말이다.___p.42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서는 나날이 더 극단적인 주장들이 일상적으로 고무된다. 여기에서 사람은 임시 부품 정도인 반면 비트는 마치 생명체라도 되는 양 대접 받는다. 진짜 사람들이 그 모든 익명의 댓글을 블로그에 남기고 동영상 파일을 올렸을 게 분명하지만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혹은 심지어 죽었는지조차 누가 알겠는가? 디지털의 벌집은 실상 인간적 개별성을 먹고 큰다.___p.56

컴퓨터에 대한 반인간적 접근은 인류 역사상 가장 근거없는 개념 중 하나다. 컴퓨터는 사람이 컴퓨터를 경험하지 않으면 심지어 거기 존재하지도 않는다. 전기가 통하는 일정한 양태의 따뜻한 실리콘 덩어리가 거기 있겠지만, 누군가 전문가가 그것을 통역하지 않는 한 비트는 무의미하다.
이는 유아론(唯我論)이 아니다. 당신의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고 굳게 믿는다 해도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총알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상의 총알은, 그것을 실제 총알의 표상으로서 인식해주는 사람이 없는 한 존재하지도 않는다. 어떤 점에서 총은 진짜지만 컴퓨터는 가짜다.___p.57

하지만, 정보에는 자유로워질 자격이 없다고 나는 말하겠다.
인공두뇌적 전체주의자들은 정보가 마치 살아 있고, 그 나름의 사상과 야심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정보가 생명이 없는 존재라면 어떡할 텐가? 아니, 생명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생각의 단편에 불과하다면? 오직 사람만이 진짜이고, 정보는 그렇지 않다면?___p.60

‘정보는 자유로워지고 싶어한다’라고 말할 때의 그런 정보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반영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며, 정보 그 자체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설령 ‘정보가’ 원하는 어떤 것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고통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___p.61

컴퓨터가 나오기 전까지는 증기엔진이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는 은유로 선호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성적 압력이 누적되어 기계 고장을 초래하면, 그 반대의 정수精髓, 곧 여성적인 것으로 균형을 잡아 압력을 줄여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야기는 일종의 경고 사례다. 컴퓨터를 우리 자신의 모델이자 은유의 대상으로 흔히 이용하는 것은, 아마도 당시 증기엔진을 은유로 쓰는 정도만큼밖에 믿을 만한 게 못 될지도 모른다.___p.63

내가 보기에 튜링 시험은 여러 세대의 공학자들에 의해 오역되거나 왜곡되어 왔다. 그의 시험은 흔히 기계들이 사람이 가진 것과 비슷한 의식을, 그 품질이 어떻든 상관없이, 습득할 수 있다는 사고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제시된다. 기계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의식을 가졌다고 믿게 만들었다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게 도리어 편견일 수 있을 게다.
하지만 튜링 시험이 정말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설령 튜링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기계의 지능은 오직 상대적인 의미로서만, 곧 온전히 그를 바라보는 사람의 생각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___p.65

컴퓨터에, 온라인 클라우드의 군중에, 혹은 다른 컴퓨터 광신도에 지능을 귀착시키는 일은 그 실상을 명확히 드러내기보다 도리어 더 모호하게 만드는 측면이 더 크다. 사람들은 컴퓨터가 지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컴퓨터가 더 훌륭한 기계인 것마냥 자기 자신을 바꾸려 든다. 컴퓨터가 바뀌어서 더 유용해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대신 자신의 수준을 스스로 낮추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디지털 기기나 온라인 서비스가 이용하기 어려우면 자신의 무지를 탓하며 컴퓨터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___p.72

나는 페이스북 친구가 수천 명에 이른다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을 꽤 많이 알고 있다. 대부분 젊은 층이지만 모두는 아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우정에 관한 정의를 희석시켰을 때만 맞다. 진짜 우정은 자신 안에 내재된 예기치 못한 괴짜스러움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성립된다. 서로 알고 있다 해도 모두는 이방인이며, 상상할 수도 없고, 오직 진실된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우리 경험에서 아직 탐구되지 않은 다름의 원천이다.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걸러지는 소셜네트워크에서의 우정이란 그보다 확실히 더 왜소한 것일 수밖에 없다.___p.99

비즈니스적 시각으로 본 소셜네트워크 사이트의 유일한 희망은 프라이버시와 인간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이 용인되게 하는 어떤 마법같은 공식을 찾아내는 데 있다. 비콘의 일화는 그런 마법 같은 일이 지금 당장 일어날 수는 없음을 입증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페이스북 이용자들이 그런 프라이버시와 존엄성 침해를 서서히 수용하는 쪽으로 꼬드겨질 수 있는가이다.___p.102

온라인 논쟁에서 다른 누군가가 맹공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볼 때면 돌연 안심이 되는 내 모습을 감지한 적이 있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내가 표적이 아니어서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의 비디오가 유튜브에서 웃음거리로 회자되고 있다면 내 비디오는 일시적이나마 보호받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나 또한 폭력적인 군중 역학의 공모자임을 의미한다.___p.109

댓글을 다는 트롤이 익명이고 표적이 실명인 경우, 그 역학 관계는 양쪽 모두 익명의 허위인간(pseudo-people)으로 맞붙는 경우보다 훨씬 더 나쁘다. 바로 그 경우야말로 집단적 사고가, 숱한 익명의 허위 인간들이 인간성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순간이다. … 한국은 세계에서도 가장 드센 온라인 문화를 가진 곳 중 하나로 꼽히며, 그야말로 그악스러운 악성 댓글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 왔다. 종종 ‘국민 배우’로까지 불렸던 한국의 영화 스타인 최진실 씨는 온라인의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 못해 2008년 자살했는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녀가 그와 비슷하게 자살한 여러 사람 중 가장 유명인이었을 뿐이라는 점이다.___p.110

내가 이런 유형의 온라인 문화를 비판하면 나는 종종 구닥다리 늙은이나 검열 옹호자로 공격 받는다. 하지만 둘다 틀리다. 나는 내가 그처럼 가학적 쾌감을 부추기는 웹사이트를 만드는 이들보다 중뿔나게 더 낫다거나 더 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클라우드 컴퓨팅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발원한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이 사람들을(우리 모두를) 열등한 유형으로 전락시킨다는 점이다. 트롤질은 일련의 고립된 사건 사고가 아니라 온라인 세계의 현재 상황이다.___p.112

종종 최악의 성향과 기질을 촉발시키는 미디어로 연결된 수백만의 사람들을 떠올린다면, 대규모의 파시스트적 군중이 어느날 갑자기 발흥할 수도 있다는 우려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나는 다음 세대가, 지금 유행이 된 군중의 집성(集成)을 강조하는 인터넷 기반의 기술과 함께 성장하는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걱정스럽다. 그런 왜곡된 온라인 문화에 길들어 커가면서 떼거리 근성에 굴복할 위험성이 더 크지는 않을까?
그런 악감정이 증폭되는 것을 막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행하게도 집단적 이상은 대규모 재난으로 급속히 커질 수 있음을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과거의 파시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도 처음에는 소규모의 이상적 혁명가들로부터 출발했던 것이다.
나는 우리가 스스로 그런 과거를 되풀이하는 쪽으로 상황을 만들어가는 게 아닌가 두렵다. 과거에는 집단적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굴욕이 결합되어 사회적 재앙을 몰고 왔다. 우리는 새로운 디지털 꾸러미 안에 이미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으며, 앞으로 10년 안에 위험할 정도로 충격적인 경제 쇼크에 직면할 가능성이 충분하다.___p.117

위배의 이데올로기는 트롤 세계의 가장 저열한 수준에서가 아니라 아카데미아의 가장 높은 수준으로부터 나온다. 모든 유형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방법을 찾는 데만 전념하는 권위 있는 학술 컨퍼런스들이 다 있을 정도다. 거기에서 적용하는 유일한 기준은 연구자들이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안전하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___p.118

나는 페이스북, 트위터, 위키피디아, 자유로운/개방적/창의적 저작권 매쉬업 같은 신新 디지털 이데올로기의 상징들을 열정적으로 우상화하는 젊은이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를 끝없는 스트레스 속에 몰아넣는 것에 늘 충격을 받는다. 지금 시대의 젊은이들은 온라인 평판을 끊임없이 관리해야 하고, 온라인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리고 언제라도 특정한 개인을 표적으로 삼아 잔인한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집단적 사고의 사악한 감시망을 피해야 한다. 어느 순간 갑자기 온라인에서 왕따가 된 ‘페이스북 세대’의 젊은이는, 거기에는 오직 단 하나의 집단(페이스북)만이 있을 뿐이므로 그로부터 빠져나올 도리가 없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나 동기를 내 마음대로 재단하고 싶지는 않지만, 디지털 기기에 열광하는 디지털 기기 숭배(gadget fetishism)의 압박은 분명히 그에 대한 애정보다는 두려움에 의해 더 강력히 추동되고 있다.___pp.126-127

21세기 초에 등장한 휘황한 웹 2.0의 디자인은 사람들을 거품 속으로 몰아넣어 유유상종하도록 유도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페이스북은 짝짓기 풀을 가득 채우고, 링크드인은 출세주의자들을 끌어모은다.___p.129

포럼을 만드는 것은 사람이지 소프트웨어가 아니다. 소프트웨어가 없다면 그런 포럼의 경험 자체가 있을 수 없으므로, 나는 그 소프트웨어를 오류가 있는 그 자체로 치하한다. 하지만 소프트웨어가 개선된다고 해서 포럼이 정말로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소프트웨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초점을 사람에서 소프트웨어로 옮겨감으로써 사안을 더욱 악화시킬지 모른다.___p.130

디지털 혁명 초기에 우리가 가졌던 핵심 바람 중 하나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계가 모든 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창출하리라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지는(최소한 미국에 관한 한) 그 반대의 효과가 더 커 보인다. 웹이 나온 이후 지난 15년 동안, 심지어 경제적 붐이 최고조에 이른 기간에도 미국의 중산층은 도리어 쇠퇴하는 한편, 부는 더욱 소수에게 집중됐다.___p.139

누스피어의 기치 아래 다른 모든 것이 평가절하되는 와중에서, 불행하게도 오직 한 상품만이 그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 ‘열린 문화’라는 무지개의 끝에는 영원한 광고의 샘이 놓여 있다. 광고는 열린 문화 덕택에 촉진제라는 이전의 역할로부터 격상되어 인간 우주의 중심에 자리잡았다.___p.140

역설적이게도, 광고는 도래할 신세계에서 진정한 상업적 보호의 이점을 누릴 유일한 표현 형식으로 지목되고 있다. 다른 모든 표현 형식은 재혼합되고, 익명화되고, 탈(脫)맥락화되어 사실상 의미 없는 것으로 전락할 것이다. 하지만 광고는 한층 더 뚜렷한 맥락을 얻고, 광고의 내용물은 절대적 신성불가침의 지위를 획득하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누구도(정말이지 누구도) 자기네 웹사이트의 구석에 놓인 구글의 광고를 감히 매쉬업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구글이 부상하기 시작할 때, 실리콘밸리에서 흔히 오간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잠깐만, 우리는 광고를 혐오하지 않아?” “아니, 우리가 혐오하는 것은 구식 광고지. 새로운 유형의 광고는 방해되지도 않고 유용해.”
광고가 새로운 디지털 벌집 경제(digital hive economy)의 중심이라는 것도 터무니없지만, 이런 사실이 일반에 더 널리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더더욱 기막힌 일이다. 지배적이고 공식적인 디지털 철학의 가장 짜증스런 주장은 어떤 분야에서는 무보수로 일하는 군중이 보수를 받는 케케묵은 구식 전문가들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위키피디아는 종종 그런 사례 중 하나로 제시된다. 무보수의 군중이 훨씬 낫다면서(그리고 내가 설명했다시피, 여러 조건이 맞는다면 그럴 수도 있는데), 왜 그 원칙이 비즈니스로서의 광고의 지속성을 무화하지 못하는가?___p.141

‘대중의 지혜(wisdom of crowds)’ 오픈 소프트웨어 운동은 큰 영향력을 갖게 됐지만, 컴퓨터 과학에서 내가 가장 보고 싶은 급진적 창의성 같은 부분을 독려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 대목만 놓고 본다면 도리어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젊고 재능 있는 여러 프로그래머들이 구식 소프트웨어 디자인이 마치 자연의 법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고, 1970년대의 지적 틀에 갇혀버린 것이다.___p.202

가장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는 온라인의 열광적 지지자조차도 언제나 복고적 성향을 보이는 것 같다. 요즘 온라인 세계에서 찬양되는 이른바 ‘참신하고, 급진적인 문화’도 대개는 웹 이전에 존재했던 문화의 사소한 버무림이다.
온라인의 대표적 문화 블로그 중 하나인 보잉 보잉(Boing Boing)이나, 유튜브에 소개되는 끝없는 매쉬업의 흐름을 살펴보라. 마치 문화가 디지털적으로 개방되기 직전 상태에서 얼어붙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쓰레기 수집자들이 쓰레기 더미에서 쓸 만한 것을 찾아 뒤지듯이 과거를 헤집는 것밖에 없어 보인다.___p.210

디지털 이미지나 다른 모든 종류의 디지털 파편은 유용한 절충물일 뿐이다. 제한된 수준에서 실체를 포착하지만, 기반한 표준 시스템이 오리지널 소스만의 독특한 품질을 제거해버리기 때문에, 어떤 디지털 이미지도 다른 디지털 이미지와 확실하게 분별되지 않는다. 다만 변형되고 뒤섞일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디지털 문화가 빈혈의 운명이라는 뜻은 아니다.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할 때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뜻일 뿐이다.___p.214

웹 2.0의 방식으로 비디오 클립이나 그림, 글을 접할 때면 컨텐츠를 올린 무명씨의 의도나 의중, 그 컨텐츠와 관련된 역사나 지역성을 알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노래가 본래 다정하거나, 씩씩하거나, 또는 구원적인 맥락을 담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웹 2.0적 전달 과정에서 그런 품질은 대개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설령 어떤 음악 비디오가 백만 번 시청됐다고 해도, 그 본래의 맥락을 박탈당했을 때는 비슷한 노래들로 가득찬 거대한 점묘화의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숫자로 표시된 인기도는 클라우드 컴퓨팅 속 연결망의 강렬함과는 연결되지 못한다.___p.219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에 대한 계산주의적 접근법으로 (물론 그러한 사고가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경우들에서지만) 내가 ‘현실주의’라고 부르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 접근법에 따르면, 정보 시스템의 일종으로 간주되는 사람은 어제 오늘 설계된 것도 아니고, 저 먼 하늘에 앉은 웹 2.0 프로그래머나 우주 공간의 스포어(Spore) 플레이어 같은 어떤 상위적 존재의 추상적 노리개도 아니다. 인간은 수십억 년의 역경을 통과한 끝에 얻어진 내재적이고 진화적인 연구의 결과다. 한 인간의 인공두뇌적 구조는 물리적 현실과의 매우 크고, 길고, 깊은 접촉으로부터 정련되어 왔다.___p.245

분리 불안증은 지속적인 연결에 의해 완화된다. 젊은이들은 트위터 같은 서비스를 통해 자기 삶의 시시콜콜한 세목을 공개하는데, 이는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취침 시간에 닫힌 문, 텅 빈 방, 격리된 마음의 견딜 수 없는 공백을 회피하기 위해서다.___p.277

오픈 소프트웨어의 이상으로부터 위키피디아의 새로운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문화의 모든 것은 문화적 유태 보존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유태 보존에는 대개 사랑스러운 면과 끔찍한 면 양면이 다 있고, 그것은 어느 놀이터에서든 벌어지는 좋거나 나쁜 점과 조응한다.___p.281

저자/역자 소개

[ 저자 서문 ]

지금은 바야흐로 21세기 초. 즉 내가 쓴 이 글을 읽는 존재는 ‘비인간(nonpersons)’, 다시 말해 오토마톤(automatons)이나, 더 이상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무감각한 군중이라는 뜻이다. 내 글은, 세계 어딘가 멀리 떨어진, 비밀스러운 장소에 있는 산업적 클라우드 컴퓨팅 센터에서 원자 단위로 세분화된 검색엔진의 키워드로 변모할 것이다. 또한 내가 쓴 몇몇 단어나 표현의 조각과 우연히 공명하는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광고를 보내도록 설계된 알고리즘에 의해 수백만 번 복제될 것이다. 재빠르지만 엉성한 독자들로 이루어진 군중에 의해 대충 읽히고, 재탕 되고, 잘못 전해져 위키(Wiki)에 올라가고, 자동 수집되는 무선 텍스트 메시지의 흐름에 뒤섞일 것이다.

내 글에 대한 반응은 점점 더 타락해 익명의 모욕적 언사와 거친 논란들로 굴비처럼 엮인 사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알고리즘은 내 글을 읽은 이들과, 그들의 구매 양식, 낭만적 성향, 그들이 진 빚, 그리고 얼마 안 가 그들의 유전자 간의 상관관계까지 찾아낼 것이다. 궁극적으로 내 글은 클라우드 컴퓨팅의 맹주임을 자임하는 몇몇 기업의 자산 축적에 기여할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확장되고 변모하는 내 글의 운명은, 거의 전적으로, 오직 정보만으로 가득 찬 무생명의 세계에서 일어날 것이다. 내 글을 진짜 사람이 읽는 경우는 여기서 극소수에 불과할 게다.

그럼에도 내가 내 글로 닿기를 희망하는 대상은 바로 여러분, 내 독자들 중 극소수에 불과한 그 ‘사람’이다.

이 책은 사람을 위해 쓴 것이지 컴퓨터를 위해 쓴 글이 아니다.

이 말을 하고 싶다. 무엇인가를 공유하기 전에, 당신은 당신만의 독립적 사고와 의지를 가진 진짜 ‘사람’이어야 한다고.


[ 저자 소개 ]

재론 레이니어 (Jaron Lanier)
컴퓨터 과학자이자 작곡가 겸 비주얼 아티스트, 작가다. 현재 직함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총괄 학자(Scholar at Large)이면서,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의 창업 및 기술 센터(Center for Entrepreneurship and Technology)의 상주 학자(Scholar-in-Residence)다.
레이니어의 이름은 또한 그 자신이 작명한 ‘가상 현실’에 관한 연구와 종종 연계된다. 1980년대 후반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를 이용해 지역적으로나 광역 네트워크로 연결된 상황에서 여러 사람이 가상 세계를 탐험하는 첫 프로그램과, 그러한 시스템 안에서 이용자를 대표하는 최초의 ‘아바타’를 개발한 팀을 이끌었다. VPL 리서치사에 있을 때 그와 그의 동료들은 수술 시뮬레이션, 승용차 내부 원형 설계, TV 프로덕션용 가상 세트,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가상 현실 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처음 시행했다. 처음으로 널리 이용된 몰입형 가상 현실 응용프로그램용 소프트웨어 플랫폼 아키텍처를 개발한 팀을 이끌기도 했다. 2009년에는 이 분야에 대한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전기•전자 기술자 협회(IEEE)가 주는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레이니어는 2006년 뉴저지공대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01년 카네기 멜론대의 왓슨 상 수혜자였으며, 2005년 제1회 ‘Edge of Computation Award’의 결선 후보였다.


[ 옮긴이의 말 ]

You are not a gadget. 당신은 도구가 아니다.

재런 레이니어의 선언은 도발적이다. 언뜻 생각하면 당연한 말 같은데도 그 느낌이 사뭇 다르고 새삼스럽게 들린다. 그 이유 중에는 ‘디지털 기기’라고 번역한 영어 원문이 ‘툴(tool)’이 아니라 ‘가젯(gadget)’이라는 점도 포함될 것이다. 가젯은 툴보다 그 가리키는 범위가 훨씬 더 협소하고 구체적일 뿐 아니라 시사적 연관성도 더 강하다. 가젯은 ‘신기하고 기발한 소형 기계장치나 도구, 부속’을 가리킨다. 스마트폰, 아이폰, 아이팟, 아이패드, 전자책 리더 등이 모두 ‘가젯’, 즉 통칭하여 디지털 기기다. 요즘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디지털 기기가 쏟아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 관심을 보이고 열광하는지 떠올린다면, 우리는 실로 디지털 기기의 사회, 디지털 기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혹시 우리 자신이 그 디지털 기기의 일부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혹시 우리가 디지털 기기의 종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레이니어는 이런 의문이 한낱 실없는 기우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다양한 차원과 각도에서 설명하고 경고한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진화, 온라인 익명성의 빛과 그늘, 디지털 문화에 대한 무비판적 신봉과 그 위험성, 흔히 ‘웹 2.0’으로 뭉뚱그려지는 소셜미디어와 소셜네트워킹의 본색, 클라우드 컴퓨팅이 가져온 ‘집단적 사고(hive mind)’ 의 반인간적 속성 등을 레이니어는 여러 사례를 들어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요즘의 유행어 중 하나인 ‘집단 지성’, 혹은 ‘군중의 지혜’에 대해서도, 그 개념의 적실성은 인정하는 한편, 그에 대한 지나친 열광이 인간의 개인적 창의성, 더 나아가 인간성을 컴퓨팅의 하위 개념으로 격하시키는 위험한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처럼 컴퓨터와 디지털 문화의 진보성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사람을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는 논리를 레이니어는 ‘인공두뇌적 전체주의(Cybernetic Totalism)’라고 부른다. 그리고 소셜미디어로 대표되는 웹 2.0이 겉으로는 ‘열린 문화(Open Culture)’를 외치지만 실상은 인간의 개별적 창의성과 독립적 사고를 클라우드 컴퓨팅의 집합적, 전체주의적 문화에 봉사하는 일개 벌의 무뇌적 봉사로 위축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정보는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Information wants to be free)”라는 말에 대한 비판에서도 레이니어의 우려는 잘 드러난다. “정보는 자유로워질 만한 자격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인공두뇌적 전체주의자들은 정보가 마치 살아 있고, 그 나름의 사상과 야심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정보가 생명이 없는 것이라면 어떡할 텐가? 아니, 생명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생각의 단순한 부산물에 불과하다면? 오직 사람만이 진짜이고, 정보는 그렇지 않다면?”

‘오직 사람만이 진짜’라는 말이야말로 레이니어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어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로 보인다. 부제가 그 성격을 뚜렷이 규정하듯, 이 책은 ‘선언’이다. 사람이 기술에 종속되고, 사람이 컴퓨터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되고, 사람이 클라우드 컴퓨팅이라는 벌집의 일개 벌로 격하되는 이른바 ‘웹 2.0’ 세상의 함정과 허상을 깨야 한다는 레이니어의 ‘인간 회복 선언’이다. 밖으로 내세운 ‘열린 문화’라는 구호와 달리, 실제로는 개개인의 독립적 사고와 의지를 ‘군중의 지혜’나 ‘집단 지성’이라는 개념 속으로 녹여버리는 벌집형 이데올로기에 대한 해부이자, 익명성으로 무장한 온라인 정글의 비정하고 비인간적 문화에 대한 비판이다.

번역은 쉽지 않았다. 머리로는 명징하게 이해되는데 정작 글로 풀어내면 모호한 횡설수설처럼 변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내 부족한 번역 솜씨와 모자라는 한글 어휘력이 물론 가장 큰 주범이었다. 적절한 한글 표현을 아직 갖지 못한 영어의 기술적 용어가 많다는 점도 만만찮은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레이니어의 글은 내게 일종의 ‘개안(開眼)’이었다. 웹 2.0이나 소셜미디어/네트워킹에 대한 신간의 8, 9할이 어떻게 하면 이를 기업 경영에 활용할지, 또는 어떻게 그로부터 큰 돈을 벌지를 소리높이 외치는 ‘실용서’인 현실의 대세를 용감하게 거슬러, 과연 웹 2.0과 소셜미디어가 우리 사회에, 문화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인간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탐구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하는 레이니어의 글은 큰 충격이었다. 레이니어가 마치 웹 2.0이라는 광야의 예언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페이스북이 비콘(Beacon)이라는 앱으로 낭패를 본 뒤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를 예견한 다음과 같은 글은 레이니어를 ‘예언자’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비콘의 낭패 뒤에도, 소셜네트워킹 사이트들에 돈을 쏟아붓는 흐름은 둔화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비즈니스적 시각으로 본 소셜네트워킹 사이트들의 유일한 희망은 프라이버시와 인간적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이 용인되도록 하는 어떤 마법같은 공식을 찾아내는 것이다. 비콘의 사례는 그것이 지나치게 빨리 나타날 수는 없음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페이스북 이용자들의 제국이 그러한 프라이버시와 존엄성 침해를 서서히 수용하는 쪽으로 꼬드겨질 수 있는가이다.”

요즘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페이스북과, 그것이 차용한 ‘친구’라는 단어에 대한 레이니어의 지적은 또 어떤가. “나는 수천 명의 친구를 페이스북에서 모았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을 꽤 많이 알고 있다. 대부분 젊은 층이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우정에 관한 정의를 희석시켰을 때만 맞다. 진짜 우정은 서로에게 자기 안에 있는 예기치 못했던 괴짜스러움을 보여주어야 성립된다. 각각의 지인은 이방인이며, 상상할 수도 없고, 오직 진실된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우리 경험에서 아직 탐구되지 않은 다름의 원천이다.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걸러지는 소셜네트워크에서의 우정이란 그보다 확실히 더 왜소한 것일 수밖에 없다.” 내가 느낀 것과 같은 공감과 충격을, 이 책의 독자들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옮긴이 소개 ]

김상현
10년간 시사저널과 주간동아에서 정보통신 전문 기자로 일하다 2001년 캐나다로 이민했다. 토론토대 대학원에서 삼림보전 분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온타리오 주 자연자원부에서 전문 삼림관으로 일하다 다시 전공을 정보 프라이버시(Information Privacy) 분야로 바꿔 온타리오 주정부 산하 에너지부, 법무부 등에서 정보 담당관, 정책 담당관으로 일했다. 2009년 앨버타 주로 이주해 현재 앨버타 주정부 산하 교육부에서 정보 프라이버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인터넷의 거품을 걷어라』(2000)가 있고, 역서로 『청소부 아버지 & 앵커맨 아들』(동아일보사 출판부), 『죽기 전에 꼭 해봐야 할 100가지』(가제, 미발간) 등이 있다.

목차

목차
  • 1부. 인간이란 무엇인가
  • 1장. 사람이 사라진 세계
  • 2장. 휴머니즘 상실의 시대
  • 3장. 반인간주의 디지털 세상
  • 2부. 돈이 모이는 곳
  • 4장. 디지털 군주제의 함정
  • 5장. 음악 속에 지어진 도시
  • 6장. 구름 속의 제왕
  • 7장. 인본주의 클라우드 경제학
  • 8장. 세 가지 길
  • 3부. 참을 수 없는 디지털 존재의 가벼움
  • 9장. 디지털의 탈을 쓴 레트로폴리스
  • 10장. 환상 속에 떠도는 디지털 창의성
  • 11장. 위키피디어의 신화
  • 4부. 비트 해방론
  • 12장. 현실적 디지털리즘
  • 13장. 언어 진화의 두 가지 이론
  • 5부. 디지털 구원의 묵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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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24 1행 ]
음을 → 믿음을

[ p65 1행 ]
하지 → 하지

[ 14장 하단 장제목 ]
14장 디지털 휴머즘 진화론 → 14장 디지털 휴머즘 진화론